크리스마스 캐럴이 그치자 이제는 새해 타령이 시작되었다. 따뜻한 인사와 희망찬 말들이 상투적이다. 사람들은 착실하게도 달력이 정해준 숫자들에 의미를 담는다. 똑같은 언어들을 교환하는 이 오랜 의식(儀式)에 태연히 섞이려니 왠지 모를 꺼림칙함이 고개를 든다. 시간이라는 캄캄한 벽이 눈앞에 버티고 선 듯하다. ‘새해’의 시작에 희망이 아닌 간절한 절망을 이야기하고 싶은 이유다.

하루의 시작과 끝을 무엇과 함께 하는지를 묻는 것은 어떤 삶을 살고 있는지에 대한 질문일지도 모른다. 누군가에게 그것은 스마트폰일 것이고,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함께 잠자리에 드는 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아마도 가장 많은 경우에 들어맞는 답은 ‘시간’이 아닐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시계를 보면서 아침을 맞이하고, 몇 시인지를 확인하고서 잠을 청한다. 하루 동안 가장 많이 보는 것도 시간이다. 이미 하루를 규정하는 주체가 시간인 것을.

하루만 그럴까. 삶의 시작과 끝에서도 시간은 끈질기게 곁을 지킨다. 몇 시 몇 분에 태어났는지가 친절하게 기록되는 순간, 불청객처럼 들이닥친 시간은 삶과의 오롯한 만남을 가로막는다. 죽음의 순간마저도 시간에 의해 매개된다. 살아가면서 단 한 번도 시간에서 벗어난 적이 없다는 깨달음에 새삼스레 아연해진다. 그럼에도, 아니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우리는 시간의 파시즘에 대해 좀처럼 생각하지 않는다.

으레 이야기되듯 시간 속에 존재하는 것이 인간의 필연적 운명은 결코 아니다. 농경과 함께 발생한 잉여 위에서 지배계층은 천체의 움직임을 양적 시간으로 환원하기 시작했고, 그들이 만들어 낸 시간은 나머지 인간들이 똑같이 행동하도록 하는 통제의 수단이 되었다. 이것은 흔히 ‘발전’의 역사로 기술된다. 이런 신앙을 받아들이는 이들에게, 지금 이 순간에도 모두가 같은 시계바늘에 따라 움직이는 모습을 상상하는 것은 어떤 느낌일까. 정해진 시간에 일을 하고, 학교에 가고, 여행을 떠나고, 쉬는 사람들. 인공지능의 등장 이전에는 인간과 기계의 경계가 분명했다고 굳게 믿는 사람들. 시간의 수도원에 갇힌 로봇들은 감금되었다는 감각마저 상실한 채 무사태평을 연기(演技)한다.

이처럼 허구로부터 탄생한 시간은 추상적, 관념적 차원을 넘어 구체적 현실을 주조한다. 눈부신 과학기술의 발전이 하사한 은혜로운 시간의 감옥 속에서 범죄자들은 안온한 얼굴을 하고 있지만, 그것은 시간이라는 구조물을 지탱하기 위해 저지른 숱한 만행을 외면한 결과일 뿐이다. 같은 모양의 시계들이 뉴욕, 런던, 파리, 도쿄, 베이징의 시간을 가리키는 벽면을 갖기 위해 자연과 우주에 가해졌을 폭력들을 상상해 보라. 10년에 걸쳐 개발한 세슘원자시계로 전 세계에 9개국뿐이라는 표준시계 보유국이 된 한국의 기여도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우리의 시간은 더럽고 추하다. 그리고 빈곤한 정신은 더럽고 추한 것에 쉽게 중독된다. 인간이 떠안은 시간의 무게가 문득 아득해진다.

1789, 1968, 2018. 속도의 테크놀로지 탓에 먼 땅에서 실시간으로 들려오는 노란 조끼 소식이 작은 위안을 주는 요즘, 한 시위 현수막에 나란히 적힌 숫자들을 떠올린다. 어쩌면 혁명의 땔감이 되었던 것은 갈수록 더 정교해진 시계가 아닐까 하는 엉뚱한 상상을 해 본다. 시간의 거부가 아닌 개편으로 마침표를 찍었던 혁명의 문법들은 시간불패의 법칙을 시리게 증명한다. 하지만 누구에게나 기쁨과 만족으로 차올랐던 삶의 장면이 하나쯤은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순간, 시간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제 ‘고도를 기다리며’ 시간을, 아니 현재를 죽이는 일을 그만두자. 권태 대신 차라리 죽음을! 시계를 부수고 시간을 죽이자. 새해 인사와 다짐 따위는 버리자. 시간의 격자로부터 우아하게 걸어 나오자.

 

글_ 김혜나 대구대학교 연구중점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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